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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동 수제화거리
가죽은 인류가 오래전부터 사용해 온 생활 소재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가죽은 신발, 장갑, 의류, 가방처럼 일상생활에 필요한 제품을 만드는 데 널리 사용됐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국내 가죽 산업은 과거와 같은 모습으로 유지되고 있지는 않습니다. 대량생산 시설은 해외로 상당 부분 이동했고, 국내에는 디자인과 샘플 개발, 소량생산, 고급 수제화, 품질관리와 유통을 담당하는 업체들이 남아 있습니다.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국내에서 가죽과 부자재를 구하고, 패턴을 만들고, 봉제 공장까지 연결하는 일이 지금보다 수월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가죽을 다루는 공장과 숙련된 기술자는 점점 줄었고, 중국을 비롯한 해외 생산기지와 협업하는 방식이 일반화됐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국내 가죽 산업이 어떻게 성장했으며, 왜 해외생산 중심으로 바뀌었는지, 앞으로 어떤 경쟁력을 갖춰야 하는지를 현장 경험과 함께 정리해 보겠습니다.
국내 가죽 산업의 역사|생활용품에서 수출산업으로 성장한 가죽 산업
우리나라의 근대적인 가죽 산업은 피혁을 가공하는 제혁업과 구두·가방·장갑 등을 만드는 제조업이 함께 성장하면서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한국전쟁 이후 생활필수품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면서 구두와 가죽제품 생산도 활발해졌고, 1960~1980년대 수출 중심의 산업화 과정에서는 신발과 가죽제품이 중요한 경공업 품목으로 성장했습니다.
당시에는 비교적 풍부한 노동력과 손기술을 바탕으로 많은 제품을 생산할 수 있었고, 부산은 신발 산업의 중심지로, 서울은 구두와 가방을 비롯한 패션잡화 생산지로 발전했습니다.
서울 성수동의 수제화 산업도 이 과정에서 형성됐습니다. 1967년 금강제화가 금호동으로 이전하면서 협력업체와 부품업체, 기술자들이 인근으로 모이기 시작했고, 이후 성수동에는 완제품 공장뿐 아니라 굽·창·장식·가죽을 취급하는 업체들이 함께 자리 잡았습니다.
한 지역 안에서 디자인과 패턴, 재단, 갑피 봉제, 저부 작업, 부자재 구매까지 해결할 수 있는 산업 생태계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형성 과정은 서울역사아카이브의 성수동 수제화 산업 자료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가죽 산업은 한 업체가 모든 공정을 혼자 처리하기 어려운 분야입니다. 원피를 가공하는 제혁업체가 있고, 가죽을 필요한 두께로 깎는 피할 업체, 패턴과 재단을 맡는 기술자, 봉제공장, 도금 장식을 담당하는 업체가 따로 움직입니다.
제가 처음 가방 생산을 배울 때도 좋은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디자인 실력만큼 이러한 협력업체들을 연결하고 관리하는 능력이 중요했습니다. 외부에서는 가방 한 개가 하나의 공장에서 완성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여러 분야의 숙련공이 순서대로 참여해 만들어집니다. 국내 가죽 산업이 성장할 수 있었던 힘도 바로 이런 촘촘한 분업 구조에 있었습니다.
국내 생산이 줄고 해외생산이 늘어난 이유
국내 가죽 산업의 생산 구조가 크게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인건비와 공장 운영비가 오르고, 중국과 동남아시아의 생산기반이 빠르게 성장하면서부터입니다.
가죽 가방이나 구두는 자동화만으로 완성하기 어려운 제품입니다. 가죽의 상처와 부위별 차이를 확인해 재단해야 하고, 곡선 부분을 봉제하거나 기리매(가죽제품의 자른 면을 전용페인트로 여러 번 바르는 작업, edge coating)에도 사람의 손이 필요합니다. 공정마다 숙련된 인력이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인건비 상승은 곧바로 제품 원가 상승으로 이어졌습니다.
저 역시 오랫동안 중국 공장과 가방을 생산해 왔습니다. 해외생산을 선택하는 가장 큰 이유는 단순히 봉제공임이 저렴해서만은 아닙니다.
가죽·안감·지퍼·금속장식·보강재를 한 지역에서 조달할 수 있고, 샘플부터 대량생산까지 연결할 수 있는 공급망이 형성돼 있기 때문입니다.
주문 수량이 많은 브랜드라면 국내에서 여러 공정을 따로 연결하는 것보다 해외 전문 공장에 생산을 맡기는 편이 일정과 원가를 관리하기 쉬울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국내 업체도 디자인과 샘플 승인, 자재 선택, 품질관리와 결제를 담당하고 실제 대량생산은 해외에서 진행하는 방식으로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해외생산이 언제나 저렴하고 편리한 것은 아닙니다. 환율이 오르면 가죽과 부자재 가격뿐 아니라 운송비와 통관비까지 함께 상승합니다.
의사소통이 정확하지 않으면 가죽 색상, 광택, 두께, 엣지코트 색상처럼 사진으로는 구별하기 어려운 부분에서 문제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특히 천연가죽은 같은 색상번호로 주문해도 생산 로트마다 색상과 촉감이 조금씩 다를 수 있습니다. 공장에 지시서를 보냈다는 이유만으로 안심해서는 안 되고, 실제 가죽 스와치와 생산 전 샘플을 확인해야 합니다.
현재 국가 통계에서는 피혁 원단만을 별도로 보기보다 ‘가죽, 가방 및 신발 제조업’이라는 산업분류로 관련 기업의 활동을 파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역과 업종별 사업체 현황은 국가데이터처 기업생태 분석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런 분류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가죽 산업은 소재 생산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가방과 신발 제조, 부자재, 가공, 유통까지 연결된 하나의 산업 생태계로 살펴봐야 현재의 변화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국내 가죽 산업의 현재와 앞으로 필요한 경쟁력
현재 국내 가죽 산업은 대량생산보다 소량 다품종과 고급 제품, 빠른 샘플 개발에 강점을 보이고 있습니다. 국내에서는 브랜드와 생산자가 가까이 있기 때문에 디자인을 수정하거나 샘플의 문제점을 확인하는 속도가 빠릅니다.
최소 주문수량이 크지 않은 신생 브랜드라면 처음부터 해외 공장에 많은 수량을 주문하는 것보다 국내에서 소량으로 시장 반응을 확인하는 편이 안전할 수 있습니다. 맞춤 수제화, 주문 제작 가방, 가죽 공예처럼 소비자의 취향을 세밀하게 반영해야 하는 분야도 국내 생산이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영역입니다.
그러나 현장에서 가장 걱정되는 부분은 숙련된 기술자의 감소입니다. 가죽을 잘 다루는 재단사와 봉제사는 짧은 교육만으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가죽의 결 방향과 늘어나는 정도를 판단하고, 제품에 맞는 실과 바늘을 선택하며, 부위별로 피할 두께를 다르게 조정하려면 오랜 경험이 필요합니다.
젊은 인력이 충분히 들어오지 않으면 장비와 주문이 있어도 제품을 만들 사람이 부족해질 수 있습니다. 실제 생산 현장에서도 기술자가 은퇴한 뒤 같은 수준의 작업자를 구하지 못해 공정을 외주로 돌리거나 생산을 포기하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앞으로는 ‘국내산’이라는 표시만으로 경쟁하기보다 국내 생산이 제공할 수 있는 가치를 분명히 보여줘야 합니다. 좋은 가죽을 사용했다는 설명에 그치지 않고 가죽의 원산지와 가공 방법, 내구성, 수선 가능 여부를 소비자에게 알려야 합니다.
재고를 많이 만들어 할인 판매하는 방식보다 주문생산과 소량생산으로 폐기물을 줄이고, 부품 교체와 수선을 통해 제품을 오래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방향도 중요합니다. 천연가죽과 합성피혁, 재생 소재를 무조건 우열로 나누기보다는 제품의 용도와 내구성, 관리 방법에 맞게 선택하는 태도도 필요합니다.
26년 동안 가방 생산 현장을 지켜보면서 느낀 것은 국내 가죽 산업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역할이 달라졌다는 점입니다. 과거에는 많은 수량을 빠르게 생산하는 것이 경쟁력이었다면, 지금은 디자인을 실제 제품으로 구현하는 개발 능력과 작은 차이까지 잡아내는 품질관리 능력이 더 중요해졌습니다.
가죽의 두께가 0.1~0.2mm만 달라져도 가방의 형태와 봉제 상태가 바뀌고, 보강재 하나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제품의 무게와 수명이 달라집니다. 이런 차이를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경험은 값싼 대량생산만으로 대신하기 어렵습니다.
국내 가죽 산업의 미래는 과거의 생산 규모를 그대로 되찾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축적된 장인의 기술을 기록하고 다음 세대에 전하면서, 디자인·소재·샘플 개발·품질관리·수선 서비스를 하나의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연결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국내 가죽 산업을 바라볼 때도 공장 수가 줄었다는 사실만 볼 것이 아니라, 남아 있는 기술을 어떻게 보존하고 새로운 시장과 연결할 것인지 함께 고민해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