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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메스 블라인드 스탬프, 알파벳이 곧 나이
명품 가방 안쪽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알파벳이랑 숫자가 조그맣게 찍혀 있는 걸 보신 적 있으실 텐데요. 이게 그냥 장식이 아니라, 사실 그 가방이 언제 어디서 만들어졌는지를 알려주는 일종의 출생신고서 같은 겁니다.
가방을 직접 만들고 생산하는 일을 오래 해온 저에게는 이 각인 코드가 남 얘기가 아니라, 제가 매일 공장에서 다루는 일이기도 한데요. 오늘은 에르메스와 루이비통을 중심으로, 이 알파벳과 숫자가 실제로 무슨 뜻인지 풀어드리겠습니다.
에르메스는 가방 안쪽, 보통 손잡이 스트랩이나 안쪽 가죽 탭에 작은 도장을 찍어두는데 이걸 블라인드 스탬프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블라인드 스탬프란 잉크 없이 가죽에 압력만으로 눌러 찍는 무색 각인을 말하는데, 색을 넣지 않고 눌러서만 표시하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어요.
이 각인 안에는 알파벳 한 글자가 들어 있는데, 이 글자 하나가 곧 그 가방이 만들어진 연도를 나타냅니다. 예를 들어 Y는 2020년, Z는 2021년에 만들어진 가방이라는 뜻이에요(출처: 라포르마, https://laforma.club/hermes-date-stamps/). 재미있는 건 이 알파벳을 둘러싼 도형의 모양도 시대마다 달랐다는 점인데, 시기별로 원형이나 사각형 안에 알파벳을 넣는 방식이 바뀌어 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저는 이 방식을 처음 자세히 들여다봤을 때, 어떻게 알파벳 하나로 여러 해에 대응할 수 있을지 궁금했는데요. 알파벳이 한 바퀴 다 돌면 다시 처음 글자로 돌아가서 재사용하기 때문에, 같은 글자라도 도형 모양이나 로고 서체 같은 다른 단서를 함께 봐야 정확한 연도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중 장치를 만들어둔 걸 보면, 단순히 재고 관리를 넘어서 위조를 막으려는 목적도 함께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알파벳 하나만 외워서는 위조범이 손쉽게 따라 찍을 수 있지만, 도형 모양과 서체까지 시대별로 맞물려 있으면 그만큼 재현하기 까다로워지거든요.
루이비통 TC코드, 태어난 공장과 시기
루이비통은 에르메스와 조금 다른 방식을 씁니다. 가방 안쪽 라벨이나 포켓 안쪽에 영문 두 글자와 숫자 네 자리로 이뤄진 코드가 찍혀 있는데, 이걸 TC코드 또는 데이트코드라고 부릅니다.
앞의 영문 두 글자는 그 가방을 만든 나라와 공장을 나타내고, 뒤의 숫자 네 자리는 만들어진 시기를 나타내요(출처: 케이와이럭스, https://blog.kylux.co.kr/louis-vuitton-tc-code-checker/).시기 표기 방식도 시대에 따라 달랐는데, 2007년 이전에는 첫째와 셋째 숫자가 생산월, 둘째와 넷째 숫자가 연도를 나타냈고, 2007년 이후로는 월 대신 생산 주차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다 2021년 3월 이후로는 이런 각인 방식 대신 내장 칩으로 정보를 관리하는 방식으로 넘어갔다고 해요. 저는 이 변화가 특히 인상 깊었는데, 각인이라는 아날로그 방식에서 칩이라는 디지털 방식으로 넘어간 게 단순히 기술 발전 때문만은 아니라고 봅니다. 오히려 위조품이 워낙 정교해지면서, 눈으로 보고 대조하는 방식만으로는 진위를 가리기 어려워졌기 때문일 겁니다.
코드 하나만 놓고 보면 국가와 공장, 시기까지 유추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그 규칙만 알면 형식을 흉내 내는 것도 가능하다는 뜻이라, 결국 코드 하나에만 의존해서 진위를 판단하기는 어렵다는 게 업계에서도 공통된 이야기입니다.
각인 코드, 가방 만드는 사람이 보는 법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브랜드는 에르메스나 루이비통처럼 자기들만의 복잡한 각인 체계를 따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훨씬 흔한 방식은, 검품이 끝난 뒤 본사가 직접 검사해서 정품으로 검증했다는 뜻으로 브랜드 고유의 도장을 따로 찍어두는 것입니다.
이 도장은 언제 만들어졌는지를 나타내는 정보라기보다, 본사 검수를 통과했다는 인증 표시에 가깝습니다. 정작 그 가방이 언제, 어느 공장에서 만들어졌는지는 이 도장이 아니라 케어 라벨에 적힌 제조 공장과 제조 연도로 확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여기서 케어 라벨이란 옷이나 가방 안쪽에 붙어 있는, 소재와 세탁·관리 방법, 제조 정보를 적어둔 작은 천 또는 종이 라벨을 말합니다. 여기서부터는 제가 직접 공장에서 겪은 이야기를 좀 보태보려고 합니다.
저희도 한국과 중국에서 가방을 생산할 때, 로트 번호라는 걸 반드시 붙입니다. 로트 번호란 같은 날, 같은 조건에서 만들어진 제품들을 하나의 묶음으로 관리하기 위해 붙이는 번호인데, 나중에 어느 원단이나 부자재 배치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로트만 골라서 추적할 수 있게 해줍니다.
명품 브랜드들의 각인 코드도 결국 이 로트 번호의 확장판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다만 명품 브랜드는 여기에 위조 방지라는 목적이 하나 더 붙기 때문에, 코드 체계를 일부러 복잡하게 만들거나 시대마다 바꾸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조그만 알파벳과 숫자 몇 개를 새기는 데도 꽤 까다로운 공정이 들어간다는 점입니다.
각인이 너무 얕으면 시간이 지나면서 닳아서 안 보이게 되고, 너무 깊으면 가죽이 눌리면서 그 자리가 약해지거든요. 그래서 각인 하나에도 압력과 깊이를 세밀하게 맞추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저희 공장에서도 새로운 라인을 시작할 때마다 각인 틀의 압력을 몇 번씩 다시 테스트하는데, 같은 틀이라도 가죽 두께나 무두질 상태에 따라 눌리는 깊이가 미묘하게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걸 직접 겪어보면, 명품 브랜드들이 왜 그렇게 각인 하나에도 까다로운 기준을 두는지 이해가 갑니다.
자주 묻는 질문 : 에르메스 블라인드 스탬프는 항상 같은 위치에 있나요.
답변 : 아니요. 버킨이나 켈리는 주로 스트랩이나 안쪽 가죽 탭에 있지만, 모델마다 위치가 조금씩 다릅니다.
자주 묻는 질문 : 루이비통 TC코드만으로 정품인지 확인할 수 있나요.
답변 : 아니요. 코드 형식이 맞아도 위조품에서 똑같이 재현하는 경우가 있어서, 스티칭이나 하드웨어 각인 같은 다른 요소도 함께 봐야 합니다.
자주 묻는 질문 : 모든 브랜드가 에르메스나 루이비통처럼 연도별 각인 체계를 쓰나요.
답변 : 아니요. 대부분의 브랜드는 검품 후 본사가 직접 검사해 정품임을 확인했다는 뜻으로 브랜드 고유의 검수 도장을 찍고, 제조 연도와 공장 정보는 케어 라벨에 따로 표기하는 방식을 더 많이 씁니다.
자주 묻는 질문 : 로트 번호와 시리얼 넘버는 같은 건가요.
답변 : 완전히 같지는 않습니다. 로트 번호는 같은 배치로 만들어진 제품 묶음을 관리하는 번호이고, 시리얼 넘버는 개별 제품 하나하나에 부여되는 고유 번호에 가깝습니다.
가방을 직접 생산하는 입장에서 이런 각인 코드들을 다시 들여다보니, 결국 이게 소비자를 위한 장치이기 이전에 브랜드가 자기 제품을 관리하기 위한 도구에서 출발했다는 걸 새삼 느낍니다.
에르메스나 루이비통 같은 브랜드가 이렇게 정교한 코드 체계를 만든 것도, 원래는 수십만 개씩 만들어지는 제품을 관리하기 위한 현실적인 필요에서 시작됐을 겁니다. 저희도 규모는 훨씬 작지만 로트 번호 없이는 어느 원단에서 문제가 생겼는지 추적할 방법이 없어서, 작은 브랜드일 때부터 이 습관을 반드시 지켜왔습니다.
다만 명품 브랜드들은 여기에 위조 방지라는 목적까지 얹으면서 코드가 점점 더 복잡해졌고, 최근에는 아예 칩을 심는 방식으로 넘어가고 있죠. 이런 변화를 보면서, 결국 각인이라는 게 단순한 표시가 아니라 브랜드가 자기 제품을 얼마나 진지하게 책임지려고 하는지를 보여주는 흔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음에 명품 가방을 살펴보실 때는, 화려한 디자인 뒤에 숨겨진 이런 조그만 알파벳과 숫자에도 한 번쯤 눈길을 줘보시면 좋겠습니다. 그 안에 그 가방이 태어난 시간과 장소가 고스란히 담겨 있으니까요.
가방을 만드는 사람 입장에서는 이 작은 각인 하나가 제품을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무언의 약속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겉으로는 잘 보이지도 않는 몇 밀리미터짜리 표시지만, 그 안에는 어느 공장에서 어떤 손으로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기록이 그대로 남아 있으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