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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가는 가방 디자인, 유행이 아니라 비율에서 나온다
신입 디자이너들과 회의를 하다 보면 꼭 나오는 질문이 있습니다. "요즘 뭐가 유행이에요?" 저는 이 질문을 받을 때마다 조금 다른 대답을 합니다. 유행을 좇아서 만든 가방은 그 시즌에는 잘 팔려도 다음 시즌이 되면 매장 구석으로 밀려나는 경우를 너무 많이 봤거든요.
반대로 몇 십 년째 팔리는 가방들을 뜯어보면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기준이 있습니다. 오늘은 그 기준을 세 가지로 정리해보려 합니다.
가방을 처음 배울 때 가장 먼저 배우는 게 비율입니다. 손잡이 길이와 몸통 높이, 몸통 폭과 두께의 관계, 이런 숫자들이 몇 밀리미터만 달라져도 같은 디자인인데 느낌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켈리백이나 스피디백처럼 몇십 년째 팔리는 가방들을 자로 재보면 재미있는 공통점이 나오는데, 몸통의 가로세로 비율이 극단적으로 치우치지 않고 안정적인 범위 안에 있다는 겁니다.
켈리백은 원래 1930년대에 서류가방으로 처음 나왔다가, 이후 배우 그레이스 켈리가 즐겨 들면서 지금의 이름을 얻었는데, 그 사이 실루엣 자체는 큰 틀에서 거의 바뀌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 부분이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유행을 타는 디자인은 그 시절 눈에만 예뻐 보이도록 비율을 과장하는 경우가 많은데, 예를 들어 특정 시즌에 유행했던 극단적으로 좁고 긴 형태나, 반대로 지나치게 넓적한 형태는 몇 년만 지나도 옛날 사진처럼 촌스러워 보입니다.
저도 예전에 시즌 트렌드에 맞춰 몸통을 과감하게 늘린 디자인을 낸 적이 있는데, 당시엔 반응이 좋았지만 이듬해 재고로 남은 물량을 보며 비율의 안정성이 왜 중요한지 뼈저리게 배웠습니다.
결국 오래 팔리는 가방들은 화려한 비율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도 어색하지 않은 균형 잡힌 비율을 갖고 있다는 걸 그때 확실히 알게 됐습니다.
여기서 하나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이건 어느 교과서에도 안 나오는 저만의 확인 방법입니다. 목업이 완성되면 세워놓고 몸통 세로 길이를 1로 잡았을 때 가로 폭이 대략 1.3에서 1.6 사이 범위 안에 들어오는지를 눈대중으로 먼저 봅니다.
이 범위는 어디서 배운 공식이 아니라 수십 번 실패를 겪으면서 제 몸에 붙어버린 감각적인 기준인데, 신기하게도 이 범위를 벗어난 디자인들은 나중에 꼭 어딘가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너무 좁으면 안에 물건을 넣었을 때 옆으로 볼록하게 튀어나와 보였고, 너무 넓으면 손에 들었을 때 허전하고 힘없어 보였습니다. 저는 지금도 신입 디자이너에게 이 감각을 말로 설명하기가 참 어렵다고 느끼는데, 그만큼 이건 숫자 하나로 딱 떨어지는 공식이 아니라 오랜 시간 눈과 손으로 익힌 감각에 가깝습니다.
소재 선택이 디자인 수명을 결정하는 이유
디자인이 아무리 좋아도 소재가 유행을 타면 그 가방의 수명도 함께 짧아집니다. 특정 시즌에만 반짝 인기 있는 화려한 프린트 원단이나 특수 코팅 소재는 트렌드가 지나면 원단 자체가 낡아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 카프스킨이나 캔버스처럼 오랫동안 검증된 기본 소재는 시간이 지나도 크게 촌스러워지지 않습니다. 저는 소재를 고를 때 이 소재가 10년 뒤에도 자연스러워 보일 지를 항상 기준으로 삼습니다.
색상도 마찬가지인데, 그 시즌 유행 컬러는 화제성은 있지만 다음 해가 되면 급격히 인기가 식는 경우가 흔합니다. 반면 블랙, 브라운, 네이비 같은 기본 색상은 늘 조용히 꾸준한 판매량을 유지합니다.
실제로 제가 담당했던 브랜드에서도 시즌 컬러 상품은 초반 매출이 반짝 튀었다가 재고로 오래 남는 반면, 기본 컬러 라인은 매 시즌 꾸준히 재주문이 들어오는 패턴을 여러 번 확인했습니다.
소재와 색상은 디자인의 겉모습만 바꾸는 요소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가방이 얼마나 오래 사랑받을지를 결정하는 가장 근본적인 변수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건 저희끼리만 하던 방식인데, 새로운 컬러를 최종 확정하기 전에 원단 조각을 사무실 창가에 일주일 정도 붙여놓고 매일 색이 어떻게 변하는지 지켜봅니다.
공식적인 내구성 테스트 장비 없이도, 이렇게 직사광선에 며칠만 노출시켜 보면 어떤 염료가 금방 바래는지, 어떤 염료가 오래 버티는지 육안으로도 꽤 뚜렷하게 차이가 보입니다.
화려하고 채도 높은 컬러일수록 일주일 만에 눈에 띄게 탁해지는 경우가 많았고, 반대로 무채색에 가까운 컬러는 거의 변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작업 들어가기전에 KOTITI (국가 공인 시험 검사기관)에서 원단 성분검사는 기본으로 해야 하는 것은 필수 과정입니다
실용성 없는 디자인은 결국 서랍 속에 남는다
마지막 기준은 실용성입니다. 아무리 예뻐도 지갑, 휴대폰, 화장품 파우치가 편하게 들어가지 않는 가방은 결국 옷장 안에서 자리만 차지하게 됩니다.
저는 신제품을 개발할 때 반드시 실제 소지품을 넣어보는 테스트를 거치는데, 이 과정에서 예쁘게만 그려졌던 디자인이 현실적인 이유로 수정되는 경우가 정말 많습니다.
지퍼 손잡이 위치 하나만 잘못돼도 사용자는 매번 불편함을 느끼고, 그 불편함이 쌓이면 결국 그 가방을 손에서 놓게 됩니다. 오래 사랑받는 가방들을 보면 대부분 이 실용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디자인적으로 세련됨을 유지하고 있는데, 그 균형을 잡는 게 생각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저는 디자인 회의에서 항상 이 질문을 던집니다. 이 가방을 하루 종일 들고 다니면 어떤 순간에 불편함을 느낄까. 이 질문에 명확히 답할 수 없는 디자인은 아무리 스케치가 아름다워도 통과시키지 않습니다. 결국 사람이 실제로 쓰면서 편하다고 느끼는 디자인만이 유행이 지나도 계속 손이 가는 가방으로 남는다고 확신합니다.
무게도 실용성 못지않게 중요한 기준입니다. 흔히 하드웨어가 묵직하고 가죽이 두꺼울수록 고급스럽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데, 저는 오히려 반대의 경우를 훨씬 많이 봤습니다.
아무리 잘 만든 가방이라도 빈 가방 상태에서부터 무거우면, 소지품을 채워 넣는 순간 어깨나 손목에 부담이 쌓이고, 결국 몇 번 들다가 옷장 속으로 들어가 버립니다.
실제로 오래도록 스테디셀러 자리를 지키는 가방들을 보면 겉보기와 달리 생각보다 가벼운 경우가 많은데, 이는 우연이 아니라 하드웨어 크기와 안감 두께, 내부 보강재 양까지 세밀하게 계산해서 무게를 덜어낸 결과입니다.
저도 신제품을 개발할 때 완성된 샘플을 들고 하루 종일 매장을 돌아다녀 보는데, 디자인상으로는 문제없어 보여도 막상 몇 시간 들고 다니면 어깨가 결리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럴 때는 내부 보강재를 얇은 소재로 바꾸거나 하드웨어를 조금 더 작은 사이즈로 교체해서 무게를 줄이는데, 신기하게도 이렇게 무게를 덜어내면 디자인이 오히려 더 정돈되어 보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무겁다고 다 고급스러운 게 아니라, 가벼우면서도 형태가 흐트러지지 않는 게 진짜 실력이라는 걸 이 과정에서 매번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정해놓은 무게 기준이 하나 있습니다. 미디엄 사이즈 숄더백 기준으로 빈 가방 무게가 대략 600그램을 넘어가면 일단 재검토에 들어갑니다.
이 숫자도 누가 정해준 게 아니라, 여러 브랜드의 스테디셀러들을 직접 저울에 올려보며 제가 임의로 잡아둔 감각적인 기준선입니다. 신기하게도 오래도록 사랑받는 가방들은 대부분 이 선 아래에 머물러 있었고, 무게가 그 이상으로 나가는 디자인들은 매장 반응은 좋아도 재구매율이 낮은 경우가 많았습니다.
물론 소재나 사이즈에 따라 조금씩 달라질 수 있는 느슨한 기준이지만, 저는 이 숫자를 넘는 순간부터 무조건 내부 구조를 다시 들여다봅니다. 이런 식으로 눈에 안 보이는 저만의 잣대를 하나씩 만들어두는 게, 결국 오래가는 디자인을 가려내는 실무자의 진짜 노하우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 가지 기준을 정리하면서 다시 느낀 건, 오래가는 디자인은 결국 화려함을 포기하는 대신 균형을 선택한 결과라는 점입니다. 유행을 좇는 디자인은 순간의 시선을 사로잡지만, 오래가는 디자인은 매일의 삶 속에서 조용히 곁을 지킵니다.
저는 26년 넘게 가방을 만들면서 화려한 트렌드보다 이 조용한 균형을 지키는 쪽을 늘 선택해왔는데, 앞으로도 그 기준만큼은 바꾸지 않을 생각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