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엄마께서 30년도 더 된 가방을 하나 들고 왔습니다. 겉면은 색이 바래고 손잡이도 거뭇하게 변했지만, 가죽 자체는 놀랍도록 단단하고 힘이 살아있었습니다. 그 가방을 버려야 할지, 계속 써야 할지라는 질문에 저는 한참을 만져보고 나서야 답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새 가방과 빈티지 가방, 소재 관점에서 무엇이 진짜 다른지 이야기해보려 합니다.새 가죽과 빈티지 가죽, 태닝 방식부터 다르다빈티지 가방이 유독 단단하고 오래 버티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과거에는 지금보다 원단 원가를 아끼려는 압박이 덜했기 때문에, 가죽을 두껍게 재단하고 표면을 거의 갈아내지 않은 풀그레인 상태 그대로 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위키백과의 가죽 관련 설명에서도 가구나 신발처럼 내구성이 중요한 제품에는 풀그레인 레더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중국 공장에 가방 생산을 문의하면 “한 스타일당 최소 300개”라는 답을 흔히 들었습니다. 처음 브랜드를 시작하는 사람에게는 300개도 상당한 부담입니다. 디자인을 여러 가지로 구성하거나 색상까지 나누면 전체 주문량이 금방 커지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습니다. 세계적인 소비 위축과 경기 불확실성이 이어지면서 브랜드들이 많은 재고를 쌓아두기보다 소량으로 시장 반응을 확인하려는 경향이 강해졌습니다. 중국 공장도 주문을 기다리기만 하기 어려워졌고, 과거에는 300개부터 받던 제품을 조건에 따라 200개 정도로 생산해 주는 사례가 생기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MOQ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수량이 줄어들면 개당 생산가격은 오히려 올라갑니다. 중국 공장이 MOQ를 낮춰..
"가죽 안 쓰니까 더 친환경이겠죠?" 비건 레더로 만든 가방을 문의하시는 분들에게 자주 듣는 말입니다. 동물을 쓰지 않았으니 당연히 환경에도 좋을 거라는 생각인데, 소재를 직접 다뤄온 입장에서 보면 이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오늘은 천연가죽과 인조가죽, 둘 중 무엇이 환경에 더 나은지 팩트체크를 해보려 합니다. 천연가죽 vs 인조가죽, 만드는 과정부터 다르다먼저 두 소재가 만들어지는 과정 자체가 완전히 다릅니다. 천연가죽은 소를 키우고 도축한 뒤 가죽을 무두질하는 과정을 거치는데, 이 무두질 과정에서 크롬 같은 화학물질을 쓰기 때문에 폐수 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수질 오염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여기에 소를 키우는 축산업 자체가 상당한 메탄가스를 배출한다는 점도 자주 지적되는 부분입니다...
가방이나 의류를 사다 보면 상품 설명에서 자체생산,자체제작,OEM 생산이라는 표현을 자주 보게 됩니다. 자체생산이라고 하면 브랜드가 모든 공정을 직접 관리해 품질이 더 좋을 것 같고, OEM이라고 하면 외부 공장에서 대량으로 찍어낸 제품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하지만 26년 동안 가방을 디자인하고 국내외 생산 현장을 경험한 제 기준으로 보면, 생산 방식의 이름만으로 제품의 품질을 판단하는 것은 위험합니다.중요한 것은 누가 공장을 소유했느냐보다 제품을 누가 기획했고, 소재와 공정을 어떤 기준으로 관리했으며, 문제가 생겼을 때 누가 책임지는가입니다. 소비자가 알아두면 좋은 자체생산과 OEM의 실제 차이를 가방 생산 현장의 기준으로 정리해 보겠습니다.자체생산이라고 모든 공정을 직접 하는 것은 아니다소비자가 생각..
가방 리폼, 소재별 가능한 범위오래 사용한 가방을 버리기는 아깝고, 그렇다고 그대로 들기에는 손잡이나 모서리의 마모가 눈에 띌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이 가방 리폼입니다. 손잡이만 바꾸거나 색을 새로 입히면 새 가방처럼 만들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모든 가방을 원하는 모습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샘플을 수정하거나 생산 중 발생한 문제를 보완하면서 느낀 점은 가방 리폼의 범위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디자인보다 소재의 현재 상태라는 것입니다. 같은 모양의 가방이라도 어떤 소재로 만들었는지, 안쪽 보강재가 얼마나 약해졌는지, 기존 바늘구멍을 다시 사용할 수 있는지에 따라 작업 결과가 크게 달라집니다. 이번 글에서는 천연가죽, 합성피혁, 캔버스와 패브릭 가방을 기..
가방을 오랫동안 생산하다 보면 수많은 고객과 상담하고 A/S 수리품을 접하게 됩니다. 그중에서도 겉가죽은 말끔한데 내부를 열어보는 순간 탄식이 절로 나오는 제품들이 있습니다. 안감 전체에 지저분하게 먹물이 번진 것처럼 거무스름한 얼룩이 남았거나, 가방 밑바닥 뼈대가 눅눅하게 꺼져서 본래의 예쁜 각을 완전히 잃어버린 경우입니다. 이유를 여쭤보면 열에 아홉은 똑같이 말씀하십니다. '집에서 장롱에 넣어둘 때 습기 차지 말라고 신문지를 빵빵하게 뭉쳐 넣었어요.' 주변에서 흔히 신문지가 습기를 잘 빨아들이고 각을 잡아준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대로 따라 하신 것입니다. 사실 신문지 채우기 자체가 완전히 틀린 방법은 아닙니다. 종이 특유의 수분 흡수력과 볼륨을 지탱해 주는 물리적인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가방의 ..
캔버스 가방은 면이나 면 혼방 소재로 만들어져 튼튼하고 편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일반 면 티셔츠처럼 물에 넣고 빨아도 괜찮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하지만 완성된 가방은 캔버스 원단 한 장으로만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안감과 접착 심지, 형태를 잡아주는 보강재, 가죽 장식, 지퍼와 금속 부자재 등 여러 재료가 함께 사용됩니다. 겉감이 물에 강하더라도 다른 부자재가 물을 견디지 못하면 세탁 후 이염이나 수축, 형태 변형이 생길 수 있습니다. 저는 26년 동안 가방을 디자인하고 생산하면서 세탁 후 앞판이 울거나 손잡이가 딱딱해진 가방을 여러 번 보았습니다. 밝은 캔버스에 진한 가죽 색이 번져 상품으로 사용할 수 없었던 경우도 있었습니다. 대부분 캔버스라는 겉감만 보고 세탁 방법을 결정했을..
가죽 가방을 고를 때 “카프스킨이 좋을까요, 램스킨이 좋을까요?”라는 질문을 자주 받습니다. 둘 다 명품 가방에 많이 쓰이는 고급 가죽이지만, 손으로 만졌을 때의 느낌도 다르고 사용하면서 생기는 흔적도 상당히 다릅니다. 부드러운 촉감만 보고 선택했다가 생각보다 쉽게 생긴 흠집 때문에 속상해하는 분도 있고, 튼튼하다는 설명만 믿고 샀는데 물자국이나 모서리 마모가 생겨 당황하는 분도 있습니다. 저는 26년 동안 가방 디자인과 생산 현장에서 여러 종류의 가죽을 다루며, 같은 카프스킨이나 램스킨이라도 두께와 표면 가공, 색상, 보강 방식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는 것을 수없이 경험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사전적인 특징보다 실제로 가방을 들고 다닐 때 어떤 차이가 생기는지, 관리가 얼마나 까다로운지를 중심으로 비교..
마트에서 사과를 살 때도 상자마다 등급이 붙어 있죠. 흠집 하나 없는 사과와 살짝 멍든 사과는 같은 나무에서 열렸어도 가격이 다릅니다. 가죽도 똑같습니다. 같은 소에서 나온 가죽이라도 어느 부위인지, 표면에 상처가 몇 개인지에 따라 등급이 갈리고, 그 등급이 결국 가방 가격까지 결정합니다. 오늘은 이 가죽 등급이 실제 현장에서 어떻게 나뉘는지 이야기해보겠습니다.가죽 등급, 국제적으로는 이렇게 나눕니다가죽 업계에서 공식적으로 통용되는 등급은 크게 네 단계로 나뉩니다. 가장 위 등급인 풀그레인 레더( Full-grain leather )는 소가죽 표면을 전혀 갈아내지 않고 원래 결과 모공 무늬를 그대로 살린 가죽입니다. 그다음이 탑그레인 레더 (Top-grain leathe) 인데, 표면을 아주 살짝만 다듬..
신사동에서 자체 가방 브랜드 매장을 운영하던 시절, 매장 오픈 준비를 마치고 쇼룸에 베지터블 가죽 가방을 처음 진열했을 때의 기억이 생생합니다. 처음 공장에서 입고되었을 때는 뽀얗고 밝은 살구빛 탄색을 띠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몇 달이 지나자 채광이 좋은 창가 쪽 선반에 올려둔 제품과 매장 안쪽 조명 아래 둔 제품 사이에 뚜렷한 색상 톤 차이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창가 쪽 가방은 햇볕을 받아 짙은 꿀빛으로 변해 있었고, 고객들이 거울 앞에서 자주 들어보던 피팅용 가방은 손잡이 중앙부터 짙은 갈색 톤과 함께 은은한 광택이 올라왔습니다. 그것이 단순한 변색이나 가죽의 불량이 아니라 '베지터블 가죽'이라는 천연 소재만이 가진 고유한 물리·화학적 호흡이자 특권임을 명확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의 밝은 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