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블로그 댓글로 "원래부터 가방 만드는 일을 하고 싶으셨어요?"라는 질문을 받습니다. 그때마다 조금 머뭇거리게 됩니다. 처음부터 거창한 꿈이 있었다기보다,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는 표현이 더 솔직하거든요. 오늘은 신사동에서 제 브랜드를 시작하게 된 진짜 이야기를 꺼내보려 합니다.신사동 가방 브랜드를 시작하게 된 진짜 계기처음부터 제 이름을 건 브랜드를 만들겠다는 큰 그림이 있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저는 원래 가방 디자이너로 일을 시작했습니다. 다른 브랜드에서 디자인 업무를 맡으며 가방 만드는 법을 하나씩 배워가던 시절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디자인만 하는 것보다 생산 전체를 직접 다뤄보고 싶다는 마음이 커졌습니다. 그래서 디자이너에서 생산업체 쪽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공장과 소재, 부자재를 직..
가죽 가방을 생산하다 보면 고객이나 브랜드 담당자로부터 이런 질문을 자주 받습니다.“지난번에 만든 가방과 똑같은 색상으로 주문했는데, 왜 이번 제품은 조금 더 진한가요?” 처음 가죽 제품을 접하는 분들은 같은 색상 번호와 같은 종류의 가죽을 사용하면 언제나 동일한 색상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공장에서 색을 잘못 맞췄거나 다른 가죽을 사용한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천연가죽은 플라스틱이나 인쇄물처럼 정해진 색상을 반복해서 찍어내는 소재가 아닙니다. 동물의 피부 상태부터 염색하는 날의 온도와 습도, 가죽이 염료를 흡수하는 정도, 건조 방식과 표면 가공에 이르기까지 여러 조건의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저는 26년 동안 가방을 디자인하고 국내외 공장에서 샘플과 본생산을 진행해 왔습니다. 그..
오래가는 가방 디자인, 유행이 아니라 비율에서 나온다신입 디자이너들과 회의를 하다 보면 꼭 나오는 질문이 있습니다. "요즘 뭐가 유행이에요?" 저는 이 질문을 받을 때마다 조금 다른 대답을 합니다. 유행을 좇아서 만든 가방은 그 시즌에는 잘 팔려도 다음 시즌이 되면 매장 구석으로 밀려나는 경우를 너무 많이 봤거든요. 반대로 몇 십 년째 팔리는 가방들을 뜯어보면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기준이 있습니다. 오늘은 그 기준을 세 가지로 정리해보려 합니다. 가방을 처음 배울 때 가장 먼저 배우는 게 비율입니다. 손잡이 길이와 몸통 높이, 몸통 폭과 두께의 관계, 이런 숫자들이 몇 밀리미터만 달라져도 같은 디자인인데 느낌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켈리백이나 스피디백처럼 몇십 년째 팔리는 가방들을 자로 재보면 재미있는 공통..
샘플 하나 완성까지, 실제로 몇 번을 뜯어고칠까새벽 두 시, 샘플실 불이 꺼지지 않는 날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손님 눈에는 매끈하게 완성돼 매장에 걸린 가방 한 점이지만, 그 뒤에는 몇 번을 뜯고 다시 박았는지 셀 수도 없는 시간이 숨어 있습니다. 오늘은 가방 하나가 세상에 나오기까지 실제로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제가 직접 겪은 이야기로 풀어보려 합니다. 디자인 스케치가 아무리 예뻐도 그 자체로는 가방이 될 수 없습니다. 종이 위의 선을 실제로 잘라 붙일 수 있는 조각으로 바꿔주는 사람이 필요한데, 이 역할을 하는 사람이 패턴사입니다. 패턴사는 평면 도면을 입체로 세워질 가죽 조각의 개수와 모양으로 옮기는 작업을 하는데, 여기서부터 이미 수정이 시작됩니다. 스케치에서는 우아하게 떨어지던 곡선이 실제 가..
레이디 디올, 슈슈라는 이름이 다이애나비 애칭으로 바뀐 사연1995년 9월, 파리의 그랑 팔레에서는 화가 폴 세잔의 회고전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이 자리에 영국의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참석했는데, 그날 그녀의 손에는 아직 정식 이름도 없던 디올의 새 가방이 들려 있었습니다. 이 하나의 장면이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명품 가방 역사의 시작점이 되었다는 걸 아는 분은 많지 않을 겁니다.이 가방은 원래 정식 이름이 없었습니다. 디올 하우스 안에서는 그저 '슈슈'라는 애칭으로 불렸는데, 이건 크리스찬 디올이 아끼던 뮤즈 미차 브리카드의 별명에서 따온 이름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당시 프랑스 대통령 자크 시라크의 부인이었던 베르나데트 시라크가 파리를 방문한 다이애나 왕세자비에게 선물할 가방으로 이 슈슈를 골랐습니다. 다..
이탈리아 가죽이 세계 최고라 불리는 진짜 이유가방을 만드는 생산 현장에 있다 보면 손님들이나 초보 디자이너들에게 가장 자주 듣는 질문이 있습니다. "대표님, 중국산이나 다른 국산 가죽도 많은데 왜 명품이나 고급 가방은 꼭 이탈리아 가죽을 썼다고 강조하나요? 단순히 브랜드 이름값 아닌가요?" 하는 물음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단순히 이름값만은 아닙니다. 저 역시 밀라노에서 열리는 세계 최대 가죽 박람회인 리네아펠레(LINEAPELLE)에 직접 가서 가죽을 눈으로 보고 사입해 본 경험이 있습니다. 현장에서 들여온 가죽으로 가방을 만들고 1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지금, 그 가죽들을 다시 꺼내 보아도 결이나 조직감이 변함없이 고급스러운 품격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물론 요즘은 국내를 비롯해 전 세계 여..
태닝의 대명사 '카우하이드(카우하이드 가죽)'의 모든 것안녕하세요! 가방 디자이너 infomina입니다 명품 매장에서 루이비통 가방을 처음 샀을 때, 손잡이(핸들)나 스트랩 부위의 매끄럽고 뽀얀 분홍빛 가죽을 보며 우아함에 탄성을 지르셨던 적이 있으실 겁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 뽀얀 가죽에 때가 타거나 물이 튀면 어쩌지?" 하는 걱정 때문에 가방을 맘 편히 들지 못하고 조심조심 다루셨던 경험도 다들 한 번쯤 있으셨을 텐데요. 많은 분들이 루이비통 손잡이에 쓰이는 가죽을 단순히 '흰색 가죽'이나 '색칠 안 한 보통 가죽' 정도로 알고 계시곤 합니다. 이 가죽은 가죽 가공의 꽃이라 불리는 '카우하이드(Cowhide) 천연 베지터블 가죽'으로, 세월과 사용자의 습관에 따라 자신만의 색으로 변화하는 세상에 ..
자카드 원단 재단이 유독 까다로운 이유, 직조기가 만드는 무늬"이 원단 왜 이렇게 비싸요?" 매장에서 자카드 원단으로 만든 가방을 소개하면 종종 듣는 질문입니다. 겉으로 보면 그냥 무늬 있는 천 같은데, 왜 유독 값이 나가는지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답은 원단 자체보다 재단 과정에 숨어 있습니다. 오늘은 그 이유를 하나씩 풀어보겠습니다. 먼저 자카드가 뭔지부터 짚고 갈게요. 가방에 그림을 인쇄하듯 나중에 무늬를 찍어 넣는 원단이 있고, 반대로 실을 짤 때부터 무늬가 함께 만들어지는 원단이 있는데, 자카드는 후자에 속합니다. 실 색깔과 짜는 순서를 다르게 조합해서 아예 원단 안에 무늬를 심어버리는 방식이에요. 이게 가능해진 건 1804년 프랑스의 조제프 마리 자카드라는 사람이 만든 특수 직조기 덕..
루이비통 대표 무늬의 비밀: 모노그램과 다미에 캔버스 탄생의 진실안녕하세요! 26년 동안 가방을 디자인하고, 국내외 원단 현장과 봉제 공장에 가방을 직접 만들어온 가방 디자이너 infomina입니다.길거리를 지나가거나 루이비통 매장 앞을 지날 때마다, 저 특유의 갈색 바탕에 별과 꽃, 그리고 L과 V가 겹쳐진 무늬가 도대체 언제부터, 왜 저런 모양으로 만들어졌고 가죽인지 pu인지 궁금해하셨던 분들이 정말 많으셨을 겁니다. 많은 분들이 저 갈색 무늬를 단순히 예쁘게 보이려고 만든 화려한 로고 디자인 정도로만 생각하곤 하십니다. 하지만 루이비통의 모노그램과 다미에 무늬는 예쁘게 장식하려고 만든 것이 아니라, 130년 전 짝퉁(모조품) 업자들로부터 자신들의 가방을 지키기 위해 짜낸 '절박한 생존 전략'의 ..
샤넬 시리얼 넘버, 1986년 위조 방지로 시작된 이유빈티지 샤넬을 감정하러 오시는 분들이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게 가방 안쪽에 붙은 작은 스티커, 바로 시리얼 넘버입니다. 그런데 이 스티커가 시대마다 위치도, 생김새도, 자릿수도 계속 바뀌어왔다는 걸 아는 분은 많지 않더라고요.오늘은 샤넬 시리얼 넘버가 왜, 어떻게 바뀌어왔는지 정리해보겠습니다. 샤넬이 가방 안쪽에 고유 번호를 새기기 시작한 건 1986년부터입니다. 1980년대 중반 칼 라거펠트가 샤넬에 합류한 이후 클래식 플랩백이 전 세계적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그만큼 위조품도 함께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샤넬은 제품 안쪽에 고유 시리얼 넘버 스티커를 부착하고, 이와 짝을 이루는 개런티카드를 함께 발급하는 방식을 도입했..
